2013년 9월 30일 월요일

성삼위일체의 진리가 완벽하게 이뤄지고 있는 유일한 교회는 하나님의교회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이 누구라고 믿느냐 묻는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아닙니까?라고 묻는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대답합니다.

성삼위일체의 진리는 인정하지만 성삼위일체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성삼위일체의 진리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하고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유일합니다!!!

새언약 안식일은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하나님의교회세계복음선교협회]

하나님의교회는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새언약의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교회에 대해 잘못 오해하고 있는 올바른 정보를 통해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중시하고 지키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길 바랍니다.

안식일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명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주간의 끝날인 제칠일을 다른 날과 구별하셨다. 그리고 그날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하셨다. 사람들도 일년 365일을 다 특별한 날로 기념하지는 않는다. 그중 아주 특별한 날들만 기억한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날로 정하신 날이 일곱째 날 안식일이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일곱 요일 중 어떤 날에 해당할까.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하신 안식일이 일요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일곱째 날은 요일상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이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시간상 겨우 하루 차이지만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판가름하고 생명과 사망을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출애굽기 31:13~15).
안식일이 요일상 ‘토요일’에 해당한다는 사실은 성경과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성경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 (마가복음 16:9)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성경버전인 개역한글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안식 후 첫날’ 즉 ‘안식일 이튿날(다음 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을 공동번역에서는 “일요일 이른 아침,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뒤 ···”라고 번역하였다.


공동번역은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고 후에 도입된 요일제도를 적용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한 것이다. ‘안식일 다음 날’을 가리켜 일요일이라고 하였으니, 그 전날인 안식일은 당연히 토요일이 되는 것이다.


달력을 보아도 일곱째 날이 토요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요일순으로 이루어진 달력을 보면 첫째 날은 일요일이며, 일곱째 날은 토요일이다. 국어사전에도 일요일은 ‘칠요일의 첫째 날’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토요일은 ‘일요일로부터 일곱째 날, 주말(週末)’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금성출판사, 국어사전 참고).


영어사전도 예외는 아니다. 영어사전은 ‘한 주 즉, 7일의 주기는 일요일을 시작으로 하여 토요일에 끝난다(Week: a 7-day cycle beginning on Sunday and ending on Saturday)’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 주의 시작은 일요일이고 마지막 날인 일곱째 날은 토요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일요일은 일곱째 날이 아니라 ‘한 주의 첫날(sunday: the first day of the week)’, 토요일은 ‘한 주의 일곱째 날(Saturday: the seventh day of the week)’이라고 되어 있다(Merriam Webster’s Collegiate Dictionary 참고).


성경의 안식일이 토요일이라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가톨릭에서도 인정한다. 다음은 가톨릭출판사에서 발행한 ‘무엇하는 사람들인가?’라는 책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안식일(安息日)’은 쉬는 날이란 뜻인데,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쉬었던 마지막 날, 즉 토요일입니다. 그래서 요즈음도 일력표에 보면 토요일이 주말로 되어 있습니다.”


가톨릭출판사에서 발행한 또 다른 책 ‘억만인의 신앙’에도 안식일이 토요일임을 밝히고 있다. “’안식’이라는 말은 ‘쉰다’는 뜻이요, 주일의 일곱째 날 곧 토요일에 해당하는 날이다. ··· 그렇지만 성서에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로 명시되어 있으니 성교회로가 아니라 성서에서부터 직접 종교를 끌어 왔다고 우기는 가톨릭이 아닌 이들도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정말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성경의 안식일은 일곱째 날로 요일상 토요일이다. 시대가 변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일은 바뀌지 않는다. 창조주의 기념일인 안식일은 창세 때부터 일곱째 날이었고, 구약시대에도, 2천 년 전에도 일곱째 날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일곱째 날이다.

2013년 9월 26일 목요일

하나님이 명하신 절기를 지키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나팔을 불어 가을 절기를 준비하는 나팔절~~~


고대 시대 나팔은 중요한 수단이었다. 특히 전쟁에 있어 지휘와 명령 전달의 도구였던 나팔의 역할은 가장 중요했다. 통신 장비가 구비되어 있지 않았던 시기 공격과 후퇴, 출발, 멈춤, 대오 정렬, 무기 준비, 발사 등이 모두 나팔소리로 이루어졌다. 이외에도 성경에서는 더 다양한 나팔의 쓰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지파가 이동할 때 나팔을 불었다. 각 지파들의 소집과 해산 등이 나팔로 가능했으며 기쁠 때도 나팔을 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이유로 부는 나팔 중 성경에서 가장 중요시했던 나팔은 성력 7월 1일 나팔절에 불었던 나팔이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지켰던 가을절기의 시작을 알렸던 나팔절은 안도와 기쁨, 회개 등의 다양한 감정이 섞여 있다.


나팔절의 의미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이집트를 나온 후 처음 십계명을 받아 온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해주신 십계명의 두 돌판을 들고 내려오던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들의 배도를 목격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위해 경건한 몸과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으리라 여겼던 모세는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보고 그 자리에서 십계명을 던져 깨뜨려버렸다. 그날 이스라엘 백성들 중 삼천 명가량이 죽었다.


그 후 모세는 백성들의 죄사함을 위해 진과 멀리 떨어진 곳에 회막을 치고 매일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날의 죄로 하나님께 버려질까 염려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회막에서 기도하는 모세를 보며 자신들의 죄를 뉘우쳤다. 귀걸이며 목걸이를 볼 때마다 금송아지를 만들며 휘청거리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너무도 어리석었던 그때를 돌아보며 몸에 지니고 있던 단장품들을 모두 제했다. 그들의 회개는 기약이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하나님께서 노를 거두시기만을 바랐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매일이 더 간절했다. 그렇게 40일이 흘렀다. 엄숙하고 조용한 가운데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를 부르셨다. 다시금 십계명을 허락해주신 것이다.


백성들은 이제야 안도했다. 그리고 기뻤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축복을 받는 다는 생각에 마음이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이제 열흘 후면 모세가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올 것이다. 백성들은 처음의 잘못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날을 기억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려 나팔을 불었다. 길게 부는 나팔은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나팔이었다. 나팔을 불며 모세를 기다리던 백성들은 한 사람이라도 우상에 빠지지 않으려 애를 썼다. 이러한 모세의 행적을 따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팔절을 제정해주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레위기 23: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레위기 23:23~24)


나팔절은 가을절기의 대표되는 초막절 속에 들어간다. 초막절 안에는 나팔절과 대속죄일, 초막절이 편성돼 있다. 날짜도 성력 7월 한 달 안에 모두 들어 있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의 시작인 나팔절이 되면 예루살렘을 방문해왔다. 예수님께서도 초막절을 맞아 예루살렘에서 전도하신 것은 초막절뿐 아니라 초막절에 내포되어 있는 나팔절과 대속죄일도 함께 지키셨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한복음 7:2, 14, 37)


나팔절은 하나님께서 제정해주신 일곱 절기 가운데 다섯 번째 절기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절기다.

**** 하나님의 교회만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나팔을 불어  하나님 앞에 회개를 올리고 죄사함을 축복을 받고
         천국으로 나아갑니다.

성경을 똑바로 볼 수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성경을 주셨습니다.
성경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본다면 하나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현미경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싶어도
촛점을 올바로 맞추지 못하면
진짜의 모습을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면
하나님을 올바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에서 성경을 보면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성경을 배우면
진리를 알아 볼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2013년 9월 24일 화요일

천국으로의 티켓은 "새언약유월절"뿐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 땅에 잠시 머물다 육신의 죽음이 후에는
영혼이 돌아가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천국!!
 
그러나 가기를 원한다고 누구나 다 갈 수 있지 않습니다.
 
천국을의 티켓을 소유해야만 합니다.
 
 
 
 
 
천국으로가는 티켓은
"새언약유월절"
뿐이라고 성경은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새언약유월절을 지키고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지구상에 유일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새언약유월절"
지키고 천국에 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새언약유월절을 알리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구원받기를~~~[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앞으로 닥칠  재앙을 예언해 주시고 언제 닥칠지 모를 재앙에서
아무도 재앙받지 않고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되길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고 계시다.

언제 닥쳐 올지 모르는 재앙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 방법을 알려주시고자 애쓰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한다.

지구수명과 이상기후 현상이 비일비재해지는 이때 한치 앞도 내다볼수 없는 우리 인생에게
 전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새언약유월절"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새언약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생명의 규례이지만 많은 사람들 기억속에는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더 유명한 최후의만찬으로 남아있는 종교사건에 불과하다 그러나 새언약유월절은 지금우리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생명의 진리이며 우리가 전심으로 찾고 찾아야할 하나님의 규례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유월절은 어떠한 재앙가운데서도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약속이 담겨있다

출12장13절 내가 애굽땅을 칠때에 그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영원한 규례로 댇에 지킬찌니라

이밤은 12절의 말씀을 보면 애굽에 장자를 멸하는 재앙이 내려지는 유월절 밤이다
하나님께서는 장자를 멸하는 큰 재앙이 내려질때 유월절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재앙이 넘어간다 말씀하셨고 실제 역사속에서도 유월절을 지킨 가정에만 장자를 멸하는 재앙에서 보호를 받을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절기의 이름 또한 재앙이 넘어간다는 뜻으로 유월절(passover)로 명칭해 주신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유월절을 지키면 재앙이 넘어간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출애굽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유월절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이루어지고 있다

실제 모세시대로부터 8백년의 시간이 지난 히스기야시대에도 강대국 앗수르의 침략에서 유월절을 지켰던 남유다는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멸망당하지 않고 보호를 받아 그 나라의 명맥을 유지할수 있었던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다

대하31장1절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르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라...

왕하19장30절 유다 족속의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가 서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찌라 ...이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히스기야의 주도하아 오랫동안 지키지 못했던 유월절을 지키게 된 기록이 역대하30장과 31장에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시대에 주신 유월절의 약속을 잊지 않고 히스기야 시대에도 그 약속대로 재앙가운데서 보호해주셨다
이는 비단 히스기야 시대뿐만 아니라 많은 재앙이 일어나고 있는 현대인에게 있어서도 새언약유월절은 필수조건이 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도 유월절을 지키지 않고 영원한 언약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재앙을 내린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24장5절 땅이 또한 그 거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으 파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중에 거하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고...

영원한 언약은 새언약유월절이며 사람들이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기 때문에 땅(지구)에 재앙을 내린다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나간 출애굽 역사와 히스기야시대의 역사를 통해 재앙가운데서 보호 받을수 있는 진리를 알려주시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배울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우리를 구원해주는 구원자를 증거하는 책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구원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라 말하고 있다

롬15장4절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성경은 이천년전 사도들을 위해 기록한 책이 아니요 마지막때 구원받을 우리들에게 교훈해 주시기 위해서 기록되었으니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진리의 도를 듣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약속도 보호도 받을수가 없다
인생은 한치 앞도 내다볼수 없는 무지한 존재요 자신의 생명을 보호할수도 없는 나약한 존재지만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한번 정하신 약속은 식언치 않으신 분이니 우리는 그약속을 굳게 믿고 행한다면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될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하나님의교회가 전세계에 앞장서서 하나님나라의 복된소식을 전하고 증거하고 있다


2013년 9월 23일 월요일

우리는 어머니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의 교회만이 하늘 어머니께서 계시는 교회입니다.
어머니하나님이 없이는 우리의 영혼의 생명은 없습니다.
 
하늘에서부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임하신
우리의 하늘 어머니~~~~
 
우리는 어머니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생명수의 근원이신 어머니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교회~~~



우주의 수많은 별들 중에 지구만이 인류가 존재 할 수 있는 이유는 물이 존재 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하나님은 지구에만 물을 존재케 하시고 물의 존재가 곧 생명이라는 법칙을 만들으셨을까?

물은 생명체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우리 인체는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물의 1~2%만 부족해도 심한 갈증을 느끼며 12%가 부족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니 물을 두고 생명 그 자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는 우리 영혼에도 적용되는 진리다. 영혼의 생명인 영생도 생명수가 있어야 유지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수가 없다면 우리 영혼도 심한 갈증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의 생명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아모스 8:11~13)


우리 영혼에 필요한 생명수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 시대가 하나님의 진리인 생명수를 구하지만 얻을 수 없어 영혼이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음을 예언하고 있다. 과연 생명수는 어디에서 받을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 생명수를 주시는 주체가 누구인지 요한은 계시록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요한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밧모섬이라는 곳에서 계시를 받았다. 천사가 모여준 미래에 대한 일들 속에서 그는 성령과 신부가 생명수를 받으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성령과 신부는 누구일까. 성령은 성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시다. 생명수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에 이 시대 성령께서 오셔서 생명수를 주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라 하겠다.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요한계시록 21:7~8)


그렇다면 성령 하나님 옆에서 함께 생명수를 주시는 ‘신부’는 어떤 존재일까. 생명수를 베푸시는 주체를 알지 못하고서는 생명수를 받을 수 없기에 ‘신부’에 대한 문제만큼은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사도 요한도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요한계시록 21:9~10)


요한은 신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했다. 이는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낡은 성벽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생명수를 주시는 신부인 예루살렘은 누구인가?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그렇다. 생명수를 주시는 성령과 신부는 곧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시다. 성령 혼자만이 아닌 성령과 신부께서 함께 생명수를 주신다는 것은 이 시대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생명수를 받기 위해 하늘 아버지와 더불어 하늘 어머니를 믿어야 함을 뜻한다. 이와 함께 구약성경에 많은 선지자들도 예루살렘인 하늘 어머니께서 생명수를 주실 것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그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스가랴 14:8)


실지로 어떤 건물에서 물이 솟아난다면 큰 문제다. 아마도 기초공사부터 다시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스가랴 선지자는 생명수가 예루살렘성에서 솟아나 동서로 흐를 것에 대해 기뻐하고 있다. 이는 실지 성전이 아닌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생명수가 사시사철 쉼없이 흘러 넘칠 것에 대한 예언이다. 이렇게 시작된 생명수는 더욱 그 양이 많아져 동서뿐 아니라 전 세계로 흐를 것을 에스겔 선지자도 예언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에스겔 47:1~5)


처음에는 발목에 오르던 생명수가 멀리 흘러갈수록 무릎, 허리까지 차 올라 나중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다. 이는 생명수인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에는 작게 시작됐지만 마침내는 전 세계로 전파되면서 점점 더 왕성하게 이루어질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 시발점이 바로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생명수라야 전 세계로 흘러간다. 세상의 다른 유명한 신학자나 성경 연구가가 아닌 오직 하늘 어머니라야 가능한 예언이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에스겔 47:12)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로부터 흘러 넘친 생명수는 결국 강이 되고 그 강 좌우에는 달마다 새 실과를 맺는 생명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잎사귀는 약재료가 된다는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은 시대를 뛰어넘어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진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요한계시록 22:1~5)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곳은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다. 많은 선지자들이 생명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난다고 예언하는 반면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예언도 성령과 신부께서 생명수를 주시는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이는 ‘어린양의 보좌’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그때에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예레미야 3:17)


하나님의 보좌는 곧 예루살렘이다. 어린양의 보좌도 마찬가지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는 다시 말해 ‘하나님과 예루살렘’이며 이는 서두에 기록한 ‘성령과 신부’ 즉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뜻한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달마다 새 실과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는 생명강이 예루살렘에서 흘러 넘치는 모습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강이 흘러나오는 것을 기록한 요한의 계시와 같다. 이는 성경 전반에 걸쳐 우리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생명수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통해 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께서 주시는 생명수를 받은 자들만이 하늘나라에서 세세토록 왕노릇함을 요한은 보았다. 누구라도 생명수를 받지 못한다면 영생도, 구원도, 천국도, 천국의 영광과 축복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심한 갈증을 느끼는 이 시대 하늘 어머니께서는 지금 이 시간도 말씀하고 계신다.
“오라! 누구든지 와서 생명수를 받으라”

2013년 9월 13일 금요일

하나님의 교회만이 하나님의 선택하신 교회입니다!!!

 
하나님의교회에서만 지켜지고 있는
하나님의 절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함으로
구원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처소로 삼으시고
친히 양육하시는 교회입니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구원 받으시길 바랍니다~!!!
 
 
 
 

2013년 9월 12일 목요일

하나님의교회는 진짜 하나님을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람믿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람 믿는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오해하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판단이 옳지 않음을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흔히 사람들은 ‘신’에 대해 감히 바라볼 수도 없고 접근할 수도 없는 신령한 분이라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다. 성경도 영적 세계의 하나님은 감히 가까이할 수 없는 신령한 분으로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디모데전서 6:15~16)


그러나 하나님은 신령한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나타나실 수 있다.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 (예레미야 32:17)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던 행적은 성경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버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창세기 18:1~8)


약 3천5백 년 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앞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이 준비한 음식도 잡수시고 아브라함과 대면하여 대화도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통해 이 땅에 탄생할 것이라 예언하시고 아기로 탄생하기도 하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1~23)


그러나 안타깝게도 2천년 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올 수 없다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는데도 말이다. 결국 그들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배척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요한복음 10:30~33)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올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을 믿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교인이다. 그리스도교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믿는 데서 출발한 것이다(디모데전서 2:5).


그런데 희한하게도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올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을 배척하고 탄압했던 유대인들의 고정관념이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그리스도교인들 앞에 다시 나타나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2천년 전 유대인들처럼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훼방하고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올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가지는 순간 더 이상 그리스도교가 될 수 없다.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교가 될 뿐이다.


2013년 9월 11일 수요일

붉은 십자가들을 하나님은 싫어한다!!! [하나님의교회]

밤이  깊어 갈수록  밤을 밝히고 있는 붉은색의 십자가!!!

그것을 바라보면 누구든 알 것이다 . 교회구나!!

우리나라 전국 어디를 가든 밤이면 붉은 십자가들이 누가도 큰가?

누가 더 높이 비추나 경쟁을 하듯하고 있다.

마치 유럽의  큰 규모의 공동묘지를 생각나게도 한다.

하나님을 믿노라하며 너도나도 경쟁하듯 세우고 있는 십자가들을 하나님은

좋아하실까???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를 세우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절하지 않으며 그것을 섬기지도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도 오랫동안 개신교를 다녀봤지만 십자가 앞에서 엎드려 절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십자가를 예배당에 걸어두는 것일까? 이렇게 질문하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대답이 있다.


“우리는 십자가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란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볼 때마다 되새긴다는 말이다. 언뜻 듣기엔 그럴듯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셨으니 그것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생각한다고 하니, 정말 아무 생각없이 듣기엔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제정신을 차리고 들어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과연 ‘숭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형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개신교인들이 따르는 장 칼뱅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떤 입장이었는지 보자.


그런데 인간이 지나치게 우둔한 생각에 물들기 전에는 우상 숭배에 뛰어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그들은 우상을 신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신의 어떤 능력이 그것에 내주한다고 상상하였기 때문이다. (중략)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조상(彫像-조각상)을 만들어 세우는 일과, 예배를 유도할 만한 비문이나 석비의 어떠한 봉헌도 금하셨던 것이다. (중략)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만들자마자 즉시 하나님의 권능이 그 형상에 부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나서는 여기에 하나님을 결부시키고, 마침내는 그것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중략) 여하한 구실을 막론하고, 우상에게 하나님의 존엄을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우상 숭배이다. (중략) 그리고 하나님은 미신적으로 경배받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상에게 무엇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빼앗는 것이 되는 것이다. (장 칼뱅, 기독교 강요 11장)


장 칼뱅은 하나님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만드는 즉시 그것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단언했다. 더욱이 ‘어떤 형상에 무엇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빼앗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결국 십자가 형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개신교인들은 그 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빼앗고 있다는 얘기다. 칼뱅은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단언했다.


십자가를 세우고 그 안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앞에서 기도를 하는 모든 행위는 우상숭배다. 개신교인들이 우상숭배자라고 치부하는 불교인도 결코 불상을 부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처를 공경하는 하나의 도구로 여긴다. 부처를 세우는 불교나 십자가를 세우는 개신교나 매한가지란 얘기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대하며 십자가를 차 안에, 집 안에 달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의미한다며 굳이 예배당과 교회 꼭대기에 세우면서 “우리는 그 앞에 절하지 않으므로 우상숭배가 아니다”고 변명하는지 답답할 노릇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위하여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도 말며 섬기지도 말라”고 하셨다(출애굽기 20:4~5).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우상숭배 행위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지 않으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 행하고 구원받아야 한다.


2013년 9월 6일 금요일

하루의 시작이 저녁일까?아침일까?

우리는 하늘에서 죄를 짓고 이 땅에 살고 있지만  나온바 하늘 나라로 다시 돌아 가야합니다.
하늘 나라로 돌아가는 여정속에서 우리가 에너지를  다 소멸시켜 버리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목적지인 하늘 나라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충전지키는 시간이
바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의 날이 너무도 중요하다.

성경은 하나님과 만나는 날은 안식일(일곱째날)이라고 알려 주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안식일을 지킨다.

그런데 하나님의교회 외에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 유태인과 안식교 교인들이다. 이들은 안식일을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지키고 있다. 일몰설에 의거한 것이다. 반면 하나님의교회는 안식일을 토요일 아침을 기점으로 지키고 있다.


일출설: 하루가 ‘일출(아침)부터 시작하여 다음 날 일출’까지라는 주장
일몰설: 하루가 ‘일몰(저녁)부터 시작하여 다음 날 일몰’까지라는 주장



이에 하나님의교회를 비방하는 자들은 ‘제대로 안식일을 지키겠다면 유태인들처럼 금요일 저녁부터 지켜야 하는 게 아니냐’며 하나님의교회가 임의로 날짜를 바꾸어 안식일을 지킨다고 비난한다. 그들의 주장처럼 유태인들이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을 지키기 때문에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먼저, 일몰설이 과연 하나님의 가르침에 합당한 주장인지 보자. 일몰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창세기 1장을 근거로 하루의 시작이 ‘저녁’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 1:31)


그들의 주장대로면 하루의 시작은 저녁이고 끝은 아침이다. 저녁부터 아침까지가 하루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낮’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또한 일몰설이 이에 근거한 것이라면 안식일도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아침까지만 지켜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제시한 성경적 근거와는 맞지 않게 안식일을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지키고 있다.


그들은 또 다른 근거로 레위기 24장을 제시한다.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레위기 23:32)


이를 근거로 안식일을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지킨다는 얘기다. 하지만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이 안식일이 ‘제칠일 안식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이 날에 누구든지 아무 일이나 하는 자는 내가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너희는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레위기 23:23~32)


여기서 7월 1일을 안식일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후 7월 8일이 안식일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기록하는가. 9일 저녁부터 안식일을 지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9일 저녁부터 10일 저녁까지 지키라고 한 안식일이, 제칠일 안식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절기에 안식할 것’을 ‘안식일을 지키라’고 표현한 것인데, 그들은 앞뒤 문맥도 살피지 않고 무조건 제칠일 안식일로 해석해 하나님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다. 참고로 7월 1일은 나팔절이고 10일은 속죄일이다.


그러므로 레위기 23장을 근거로 제칠일 안식일을 주장하는 것은, 절기의 안식일과 제칠일 안식일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펼치는 어리석은 주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제칠일 안식일을 언제부터 지키라고 하셨을까.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세기 1:31, 2:1~3)


하나님께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여섯째 날이라고 선포하셨다. 언제 선포하셨는가? 아침이다. 그러면 일곱째 날은 어느 시점부터 시작하겠는가. 이 역시 아침이다. 당연한 말씀이다. 이처럼 안식일은 일곱째 날 아침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된다는 일몰설은 성경 가르침과 결코 맞지 않다.


그렇다면 유태인들은 왜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을 지키는 것일까. 율법을 꿰고 있다 자부하는 그들이 왜 이런 실수를 범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느헤미야 당시의 기록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식물을 팔기로 그 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유다 자손에게 예루살렘에서도 팔기로 내가 유다 모든 귀인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너희 열조가 이같이 행하지 아니 하였느냐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으로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이제 너희가 오히려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함이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하고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갈 때에 내가 명하여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내 종자 두어 사람을 성문마다 세워서 안식일에 아무 짐도 들어 오지 못하게 하매 장사들과 각양 물건 파는 자들이 한두번 예루살렘성 밖에서 자므로 내가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 밑에서 자느냐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 하였더니 그 후부터는 안식일에 저희가 다시 오지 아니하였느니라 (느헤미야 13:15~21)


구약의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인데, 느헤미야의 기록을 보면 안식일에 장사를 하고 있다. 이에 온전하게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 전날, 성문을 닫는 역사가 있었다. 이를 시작으로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을 준비하는 습관이 이어져 내려왔던 것인데, 문제는 이런 관습이 너무 과하여서 안식일을 예비하는 금요일 저녁마저 안식일로 생각해버린 데 있다. 안식일을 아예 지키지 않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안식일을 애써 지키면서도 사람의 생각이 덧붙여져 왜곡된 안식일을 만들어 지키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의교회는 성경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절기를 지킨다. 유태인과 같은 사람의 관습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따라서 ‘유태인처럼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은 안식일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주장에 불과하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교회는 하나님의교회가 유일하다.

그러니 하나님의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에너지를 충분히 충전해서 달려나가야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에 도착 할 수 있다.

2013년 9월 5일 목요일

마지막 때 등장하는 아담을 만나야 구원~~~// 하나님의교회


많은 사람들이 아담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최초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성경에서는 최초의 남자로 창조 되었던 아담 한 사람만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또다른 아담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왜???
성경은 최초의 아담이 아닌 또 다른 아담의 등장을 증거하고 있을까??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영혼을 그 속에 넣자 비로소 아담은 생명을 가진 존재로 탄생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


이렇게 창조된 아담은 그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하와와 함께 에덴동산에 거했다. 후에 아담은 930세라는 나이로 죽기까지 가인과 아벨 등 많은 자녀를 낳았다고 구약성경 창세기는 전하고 있다. 이것이 아담의 일생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이러한 아담을 두고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린도전서 15:45)


창조된 아담은 분명 한 사람인데 성경에서는 첫 사람 아담이 있고 마지막 아담이 있다고 말한다. 이 말씀 가운데 두 아담은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며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다. 첫 사람 아담은 구약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하나님께서 흙으로 육체를 만들어 그 속에 영혼을 불어 넣어 생명을 가진 존재로 탄생시킨 아담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아담은 누구인가. 마지막 아담에 대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힌트는 ‘살려주는 영’이라는 점이다. 이로 보건대 마지막 아담은 죽어가는 인류를 살려주기 위해 오시는 구원자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담을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로마서 5:14)


아담을 오실 자에 대한 표상이라고 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오실 자’는 성경 맨 마지막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0)


‘오실 자’는 장차 오실 예수님 즉 재림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로마서에서 ‘오실 자’를 표상하는 아담은 바로 재림 예수님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아담 또한 마지막에 등장하시는 재림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면 ‘살려주는 영’으로 오시는 마지막 아담인 재림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인류를 살려주실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한복음 6:54)


마지막 아담인 재림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방법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고 하셨다. 과연 예수님의 살과 피는 어떻게 먹고 마신단 말인가.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가라사대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마태복음 26:17~19)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26~28)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떡을 당신의 살로, 유월절의 포도주를 당신의 피로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살려주는 영’인 마지막 아담이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방법이다.


마지막 아담의 예언 그대로 유월절을 가지고 오신 재림 예수님은 과연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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